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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3·1운동유적답사를 6월 29일(토)에 다녀왔습니다.

2019-07-03 20:56:32

관리자


 

 

 

6월 29일(토)에는 서울지역 3·1운동유적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천도교 여성회본부는 시민답사단과 함께 3·1운동의 거대한 물결이 처음 시작된 서울 종로, 인사동 일대의 유적을 답사하고 이어 북한산의 봉황각과 애국열사 묘역을 찾았습니다.

 

서울의 종로와 인사동 일대는 3·1운동을 논의하고 준비했던 손병희선생 집과 승동교회, 유심사, 중앙고보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 건립자금이 3·1운동자금으로 쓰였고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한 천도교 중앙대교당,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 성난 파도와 같은 민중들의 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된 탑골공원 등 수많은 유적이 있는 3·1운동의 성지입니다.

 

또한 북한산에는 손병희선생이 훗날 3·1운동의 주축이 된 483명의 지도자를 길러낸 봉황각과 이준 열사와 김창숙, 이시영, 여운형 선생 등 민족지도자들이 잠들어 있는 애국지사 묘역이 있습니다.

 

 


 

 


 

 


 

 


 

 


 

 

 

 

 

 

3·1운동이 일제 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평가되는 것은 거족적·거국적 투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3·1운동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어느 특정계층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거족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어느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민족이 거주하고 내딛은 곳 어디서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저 멀리 쿠바에서, 블라디보스톡에서, 미주에서, 프랑스에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고 독립만세 함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서울은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곳으로 광무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향하여 고향의 만세운동을 주도함으로서 거국적 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이 때 조선독립신문 또한 함께 배포되었습니다.

 

또한 3개 종단이 연합하여 최초로 3·1만세운동을 외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3개 종단이 연합하였다는 뜻은 전국민이 함께 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에 초기기획 단계에서의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의 거룩한 투쟁이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교당건축을 위해 1906년 5월 1일부터 종령 제25호를 통해 각 개인이 한 달에 10전씩을 해당교구에 내도록 하는 등 재정 마련을 하였는데 당시 3·1운동자금은 바로 이 대교당 건립비용에서 충당하였습니다.

    원래 대교당은 1918년 12월 1일 교일기념일에 맞춰 개기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하여 1920년 4월에 낙성할 계획이었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공사가 지체되었다가 1920년 2월에서야 겨우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듬해 2월 28일에는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한 교회월보사, 청년회, 개벽사 등이 경운동 신축 총부본관 건물로 이전하였습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그 건립 기금이 3·1운동 등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부한 자리였고 이후 항일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습니다.

  • 대각사

    대각사를 창건한 용성스님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 대표로 참여한 것이 문제가 되어 2년 여 간의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출소 스님은 경전 번역과 전법을 하는 동시에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서울에 오면 대각사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만주 독립운동 지원으로 인해 1931년 대각사는 조선총독부에게 재산 몰수를 당하고 수모를 겪습니다. 1940년 음력 2월 24일 용성스님은 조선 해방을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열반하였습니다. 스님의 사리탑은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 산록에 세워졌습니다.

    대각사는 용성스님의 전법과 열반의 땅이며 3·1운동의 성지입니다.

  • 탑골공원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학생 대표가 공원 안의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공원을 나서 시가행진을 시작합니다. 이 때 종로를 거쳐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길의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만세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3·1운동의 거족적인 독립만세 시위는 이렇게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탑골공원 삼일문에는 광복 직후 서예가 김충현씨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삼일문’ 현판을 새로 달았습니다. 그러나 3·1운동 성지인 탑골공원에 일본군 장교가 쓴 현판을 걸 수 없다하여 2003년 2월 기존 것과 동일한 크기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여 달았습니다. 현판의 글씨체 중 ‘삼’자와 ‘일’자는 독립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이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었습니다.

    공원 안에는 3·1운동 때 민중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팔각정이 있습니다. 동북쪽 담장에는 3·1정신 찬양비와 3·1운동을 형상화한 10개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1980년에 건립한 3·1운동 기념탑(독립선언서)이 있습니다. 그리고 1966년 5월 19일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에서 건립한 손병희선생의 동상이 파고다 중앙공원에 건립되었습니다.

  • 승동교회

    승동교회는 연희전문 출신의 학생단 대표 김원벽이 다녔던 교회로, 3·1운동 준비과정에서 1919년 2월 20일 학생단 제1회 간부회를 열어 조직체계를 정비한 곳입니다. 2월 28일에는 제4회 학생단 간부회가 열려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이튿날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놓았습니다.

    승동교회는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지금의 롯데호텔 부근 곤당골에 세운 교 회에서 비롯되었으며, 1905년 종로 피마골 뒤편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 ‘승동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승동교회는 대가집 소실들과 장인, 백정들이 모여든다고 해서 ‘첩장교회’란 별명이 붙은 당시의 대표적인 민중교회였습니다.

  • 태화관 터-3·1독립선언

    태화관은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옛 순화궁 터에 있던 요릿집으로 3·1독립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독립만세 운동계획에 따른 준비를 1919년 2월 28일까지 완료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 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1919년 3월 1일 오후2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갖고,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전화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현재 이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세워져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태화관터에 오는 8월 15일까지 ‘3·1독립선언광장’을 조성하기로 하고 공사를 진행 중이며 광장 안에는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천도교, 기독교, 불교종단이 함께 ‘3·1운동100주년기념비’를 건립할 예정입니다.

  • 보성사 터(조계사-수송공원 일대)

    보성사는 1919년 2월 20일부터 이종일 장효근 최남선 신영구 등이 2차에 걸쳐 25일에 25,000 매, 27일에 1만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입니다. 2차 인쇄 시 인쇄소의 작업 소리 때문에 형사 신승희에게 현장이 목격되었으나 사장 이종일이 손병희선생에게 받은 5,000원뇌물로 주어 간신히 위기를 넘겼습니다. 또 27일에는 독립선언서 1만 매를 건축 중인 대교당(이종일의 집)으로 가지고 가다가 경찰에게 검문을 당했으나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월 1일 독립선언의 취지를 민중에게 알리기 위해 이종린에게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15,000부를 발행케 하여 선언서과 함께 배포하였습니다.

 

  • 의암 손병희 선생 집터

    현재 가회동주민센터 옆 청남문화원 빌딩 자리는 손병희 선생이 서울에서 거주하던 곳이었습니다. 3·1운동 전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은 이곳 손병희 선생의 집에 모여 독입선언식 절차를 최종 점검하였습니다.

    3·1운동으로 인하여 천도교 재정이 악화되자 천도교 중앙총부 간부들이 살고 있던 교회 소유 가옥 대부분 매각되면서 손병희 선생의 가회동 집도 보성초등학교에 기증하게 됩니다.

 

  • 중앙고등학교

    1926년6월10일 중앙고보생 30~40명은 8시 30분경 순종의 국장 행렬이 단성사 앞에 이르자 이선호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천여 매를 살포하면서 6·10만세운동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이밖에 ‘통동계’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중앙고보생 박용철과 이동환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는 격문을 살포하는 등 6·10만세운동 과정에서 중앙고보 학생들이 펼친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이 일로 중앙고보 학생 43명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그 중 6명이 수감되었습니다.

    중앙고등학교는 계동 1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문을 올라가 교정에 들어서면 인촌 김성수의 동상이 있고, 동쪽에는 1919년 1월 동경유학생 송계백이 2·8선언문 초안을 현상윤과 송진우에게 전달하고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린 3·1독립운동책원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유심사 터

    유심사는 3·1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무르며 불교잡지 『유심(唯心)』을 발행하던 곳으로,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입니다.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 사이의 독립운동 일원화가 성사되자, 최린은 계동 유심사(惟心社)로 한용운 선생을 찾아와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불교계의 참여를 확약 받았습니다. 이후 한용운 선생은 용성스님을 불교계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한편, 2월 28일 밤 중앙학림 학생 신상완·백성욱·김대용·오택언·김법린·박민오 등을 유심사로 불러 각처에 배포할 독립선언서 3천매를 전달하였습니다.

 


 

 

봉황각

봉황각은 1912년 천도교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손병희 선생이 설립한 2층 목조 기와집의 교육시설입니다. 수봉과 백운대로 가는 입구에 있습니다.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봉황각이라는 명칭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남긴 시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걸려있는 현판은 오세창 선생이 썼는데 ‘봉(鳳)’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황(凰)’자 또한 당나라 명필 회소(懷素)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米芾)의 서체를 본뜬 것입니다.

손병희 선생은 이 곳을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뿌리내리게 하는 한편,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사용하는 한편 1912년 부터는 7년동안 이곳에 살면서 천도교의 발전책과 구국운동을 구상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하였으며, 특히 3·1운동 때 이곳을 거쳐간 간부들이 주도적 구실을 하였습니다.

 

애국지사 묘역

북한산국립공원 자락 저지대 일원을 따라 총 길이 63.2km, 11개 구간으로 조성돼 있는 북한산둘레길 중 ‘소나무숲길’ ‘순례길’ ‘흰구름길’ ‘우이령길’ 등 총 4개 구간의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우이동 솔밭공원을 연결하는 제2구간 순례길(3.4km)은 독립유공자 묘역이 이어지며 그들의 애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어 이름도 ‘순례길’이라 합니다.

 

이역만리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무효와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순국한 이준 열사를 비롯해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 선생, 항일 독립 투쟁과 광복 후 좌우 합작운동을 펼친 여운형 선생,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임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이시영 선생 등 우리나라 독립과 건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이 영면해 있습니다. 또 김창숙, 이명룡, 신숙 등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들부터 신익희, 조병옥 등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진 정치가, 조국 광복을 위해 꽃다운 목숨을 바친 17위 광복군 합동묘까지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는 곳입니다.

 

우이령길 입구에서 20여분 내려오면 제일 먼저 의암 손병희 묘역과 천도교의 산실인 ‘봉황각’을 만날 수 있으며 소나무숲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몽양 여운형 묘역에 닿습니다. 그리고 2구간 순례길은 애국지사들의 묘역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4.19묘역과 신숙-김도연-서상일-김창숙-양일동-유림-이시영, 광복군 합동묘역-김병로-이준-신익희-신하균 묘역으로 이어집니다.

 

 

 

번호 댓 글